이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인간과 삶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주인공인 불가사의한 소년은 세상과 인간을 한 발 떨어져 관망하는 제3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누구보다 인간적인 선택을 해 나간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세상의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도 흥미로운 일인지 자연스레 생각하게 된다. 에피소드마다 분위기와 이야기가 모두 달라 읽는 재미도 크고, 잔잔하면서도 오래 남는 여운이 있다. 절판된 뒤에도 꼭 소장하고 싶어서 중고서점을 한참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개인적으로 정말 애정하는 작품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인간의 내면이나 삶의 의미처럼, 쉽게 답이 나지 않는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 ✔️ 무겁고 복잡한 주제를 좋아하지만 너무 딱딱한 책은 부담스러운 사람 ✔️ 잔잔한 분위기 속에서도 철학적인 여운과 인간적인 따뜻함이 남는 이야기를 찾는 사람 ✔️ 『천재 유교수의 생활』을 재밌게 읽은 사람이라면 더욱 추천!(같은 작가의 작품)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스펜서 존슨
두 마리의 쥐와 두 명의 작은 인간이 미로 속에서 치즈를 찾아가는 우화를 통해, 변화와 불확실함 앞에서 어떻게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상황도 변하지 않는다 .”
아주 짧고 가볍게 읽히는 책이지만, 그 안에는 삶에서 끊임없이 마주하게 되는 변화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몇 년 전의 나는 불안이 너무 커서 변화를 두려워했고, 늘 안전한 선택만 하려는 사람이었다. 결국 도전조차 해보지 못한 시간들이 오래 후회로 남았다. 이 책은 그런 시기에 고모의 추천으로 읽게 됐다. (참고로 고모는 굉장히 도전적인 분이다.)
살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새로운 환경과 선택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때마다 두려움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다면 사람은 점점 더 고립되는 것 같다.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선택이 꼭 나쁜 건 아니지만, 과거의 나처럼 막연한 두려움으로 변화나 도전을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특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해보고 싶은 것은 많은데 마음의 두려움이 커서 좀처럼 첫발을 내딛지 못하는 사람 ✔️ 관성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슬슬 위기감이 들기 시작한 사람 ✔️ 쉽고 짧게 읽히는 책으로 묵직한 삶의 메시지를 접하고 싶은 사람
『변신』 카프카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해버린 한 인간을 통해, 소외와 인간 존재의 불안함을 그려낸 이야기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어린 시절 표지 일러스트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집어 들었다가 오랫동안 충격과 여운이 남았던 작품이다. 처음 읽었을 때는 ‘어떻게 사람이 벌레로 변할 수 있지?’라는 생각과 함께 그저 기괴하고 낯선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읽었을 때는 그 ‘벌레’라는 존재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절과 겹쳐서 읽으니, 서서히 무너져가는 주인공의 감정이 공감되면서도 두려웠다. 이 작품은 세상에서 불편한 존재가 되었을 때 인간이 얼마나 쉽게 고립될 수 있는지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읽고 나면 마음 한편이 불편하고 묵직하게 남지만, 그래서 더 나의 쓸모와 존재의 이유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는 소설이라고 느꼈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인간의 외로움, 소외,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깊게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 ✔️ 부조리와 인간의 불안을 다루는 철학적인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 인간 사회의 차가운 현실을 담은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 ✔️ 벌레(?)에 면역이 있는 사람
『바깥은 여름』 김애란
상실 이후에도 계속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과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소설집이다.
“바깥은 여름인데 마음만 계절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
예쁜 표지에 이끌려 읽었다가 예상보다 훨씬 큰 여운과 후폭풍이 남았던 책이다. 제목처럼 바깥은 눈부시게 밝고 평범한 여름인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너무도 현실적이고 서글픈 감정을 품고 있다. 에피소드마다 어쩌면 이렇게 찝찝하고 먹먹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인데, 그럼에도 인물들은 저마다의 삶을 담담히 살아낸다. 읽다 보면 마치 다큐멘터리 속에서 큰 시련을 겪는 야생동물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들어가 안아주고 구조해주고 싶지만, 결국 그들은 스스로 버텨내야 하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에 더 마음이 아팠다. 김애란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한 감정을 섬세하게 풀어내는 힘이 정말 뛰어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판타지보다 현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 읽고 나서 마음 한편이 먹먹해지더라도 오래 여운이 남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 현실적이고 섬세한 감정선을 좋아하는 사람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노요코
수없이 죽고 다시 살아난 고양이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이야기다.
“고양이는 더 이상 살아나지 않았다 ”
동화책이지만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야기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삶 속에서 오직 자기 자신만 사랑하던 고양이가, 처음으로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그리고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뒤에는 상실의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마침내 자신의 삶을 조용히 끝맺는다. 사랑받는 도도한 고양이의 삽화는 무척 귀엽고 따뜻한데, 끝까지 읽고 나면 이상할 만큼 마음이 먹먹해진다. 단순한 그림책처럼 보이지만 한 존재가 사랑을 통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라서, 마지막 장에서는 자연스레 눈물이 나게 된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 ✔️ 짧은 동화책으로 삶과 사랑을 느끼고 싶은 사람 ✔️ 조카에게 선물할 책을 찾고 있는 사람
chap3. 독서 페어링 아이템
독서쿠션
독서를 같이하는 친구가 자기 전 책 읽는 모습이라며 보여준 사진에서 독서쿠션이라는 아이템을 알게 됐고, 나도 바로 구매했다. 자기 전에 책을 읽고 싶은데 누워서 읽으면 팔이 저리고, 엎드려 읽으면 눈에도 나쁘고 목도 아프고 총체적 난국이 펼쳐진다. 독서쿠션은 무릎에 올려서 보기 딱 좋아, 하루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고 싶은 사람에게 딱인 아이템이다.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어두운 새벽녘에 눈을 뜬다. 밖은 비가 내렸는지 짙은 안개가 자욱했고 지끈지끈한 두통으로 인해 잠을 설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일어선다. 긴 하품과 함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다 피로해 보였고 그들도 삶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열차 소리와 방송 안내음 외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한 열차 안에서 나를 비롯한 그들은 스마트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시선은 언제나와 같이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액정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그렇게 도착역에 다 와갈 때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 강제로 종이를 급하게 쥐어주고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나에게 지금 뭘 전달하려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2 사내 캠페인 홍보지였다. [마인드 리셋 데이 : 3, 6, 9, 12월 넷째 주 금요일,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 직원에게 휴식을 권장합니다.] 처음엔 ‘우리 회사가 유급 휴가를?’ 같은 의심이 블라인드를 도배했지만, 이제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모두 아는 제도를 굳이 홍보할 이유가 있나? 자세히 보니 재작년 날짜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합병 전 로고도 눈에 띄었다. 뭐야,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이걸 왜… 나한테?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번 더 종이를 살폈다. 뒷면에도 흐릿한 글씨가 있었다. [대외비/ 담당자 외 열람 금지]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이전 분기 발생한 보안 사고를 고려하여, 일부 조치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급하게 출력한 듯 내용이 잘린 공문. 여백엔 빨간 색연필로 휘갈긴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무심코 종이를 문지른 손끝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마치 지장이라도 찍은 듯, 선명하게.
#3 사무실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출근 시간인데도 사람들의 대화는 줄었고, 다들 화면을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신저에는 “오늘 시스템이 자꾸 끊긴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왔다. 순간 아침에 본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설마… 우연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여백에 적힌 붉은 글씨가 어째서인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 “종이 받으셨죠? 이번 달은 당신 차례입니다.” “네? 뭐가 제 차례인가요?”라고 말하자 상대방이 말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죠?”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대답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통화 속 상대방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묘한 전화 통화를 뒤로하고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사무실 전체의 불이 잠시 깜빡이더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내 캠페인 홍보지를 받은 사람은 즉시 회사 밖으로 나오세요.” 놀란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이냐며 서로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눈치였다. 홍보지와 이상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 안내 방송은 결국, 나를 향한 경고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5 ‘뭔가 이상한 하루야’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아까 받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겨진 종이 아래 깔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요동치던 가슴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층으로 몸을 피했다. 어둡고 쾌쾌한 공기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치한 곳은 23층과 22층 사이, 바로 22.5층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 그것은 분명 내가 방금 전에 받은 그 종이와 똑같았다. “너도 받은 거야?”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표정은 차갑고, 마치 내가 말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다 받았다는 게 문제야.” 그는 종이를 펼쳤다.
#6 – 이번 달엔 뭘 할래? 내가 받은 종이에 있던 것과 같은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는 정보로 뒤죽박죽이었다. 오늘은 회사 지정 ‘마인드 리셋 데이’도 아니었는데 기록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사내 홍보지도 우리 둘에게만 온 듯했다. 또 이 남자는 누구지?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었지?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은 무슨 말일까?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남자였다. “이 짓을 몇 번이나 해도 생각 많은 건 여전하네.” “뭐라고?” “……아냐.” 남자는 잠시 말을 삼키더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 안내방송에서 나오라고 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왠지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는 먼저 비상계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 또한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7 비상계단을 벗어나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옥 깊숙이 숨겨진 낯선 전산실이었다. 서버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 사이로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컴퓨터와 연결된 프린터가 쉴 새 없이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종이 위에는 소름 끼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내가 비상계단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지금 이 방에 발을 들인 순간의 묘사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모니터 위에서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이번 달엔 뭘 할래? : 당신의 선택] “이게 대체 다 뭐야? 어떻게 우리가 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서가던 남자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망설일 시간 없어. 시스템이 복구되면 이 기회도 사라질 테니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써.” 나는 홀린 듯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일었다. 자판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 사이로, 삼켜왔던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첫 자판을 내리눌렀다. 타닥. 정적을 깨는 둔탁한 타건음과 함께, 나의 비밀스러운 소망이 화면 위로 한 글자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8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타닥. 화면 위에 찍힌 첫 문장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당장 퇴근한다.] 순간 프린터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종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는 곧장 종이를 집어 들고 내가 쓴 문장을 읽더니 작게 비웃었다. “푸핫. 겨우 그거야? 이 엄청난 시스템에 쓰는 바람이 고작 ‘퇴근’이라고? 하지만 역시, 다들 처음엔 그걸 쓰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 더미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한 번씩 선택을 했어.” 남자가 모니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의 붉은 글씨가 바뀌었다. [선택 확인: 퇴근한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59]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10분 안에 네가 진짜로 퇴근하지 못하면, 시스템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 선택을 완수할 거야.” “다른 방식…?”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뭐, 예를 들면… 회사가 사라진다든지.” 그 순간, 건물 어딘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9 경보음이 사옥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모니터 속 숫자는 인정사정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 00:09:41] “그냥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은 네가 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쓸 때의 ‘마음’을 실행해.” 그 순간 전산실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내 팔을 붙잡고 뒷문으로 달렸다. 좁고 어두운 통로 끝에는 낡은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퇴근 처리실] 문 옆 벽면에는 빛바랜 명단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이 여러 번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3월, 6월, 9월, 12월…… 그리고 이번 달. “나……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어?” 남자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 00:05:12] 문 안쪽에서 아침에 들었던 바로 그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으셨네요. 이번 달 담당자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문을 열면, 모든 게 기억나게 될 거야.” 딸깍. 문이 열리자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 속에 일제히 내가 나타났다. 종이를 건네받는 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나, 위태로운 선택을 하는 나.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나와 함께 도망쳐온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10 찍순이
문이 열리자 좁은 방 안 가득 모니터 불빛이 번쩍였다. 화면마다 서로 다른 ‘나’가 있었다. 누군가는 사무실을 뛰쳐나갔고, 누군가는 울고 있었고, 또 다른 나는 멍하니 키보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비상계단에서 만난 남자와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스템은 사람들의 선택을 현실로 만드는 장치야. 넌 이미 여러 번 여기 왔었어.”
믿기 어려웠지만 벽에 붙은 기록 속에는 내 이름이 반복해서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경보음이 울렸고 화면에는 남은 시간이 떠올랐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 00:00:30]
남자는 내게 마지막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예전의 나는 늘 “퇴근한다”라고 적었다고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닥.
[반복을 끝낸다.]
문장을 입력하는 순간 전산실의 불빛이 차례로 꺼졌고, 모니터 속 수많은 ‘나’도 하나씩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는 붉은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