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추추 큐레이터의 취향 책방

chap1. 취향을 말하다

『눈부신 안부』, 백수린

다정한 마음이 서로를 성장하게 만드는 이야기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이 책은 회피하던 상처를 직접 마주하는 용기, 그리고 사람을 살게 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시절 아픈 사건을 겪은 한 가족이 독일로 이주한 뒤의 시간들을 회상하는 소설로, 주인공은 오랫동안 외면해온 과거를 천천히 들여다보며 상처를 마주하고 조금씩 치유해 나간다.

잔잔한 문장 속에 스며든 감정들은 읽는 내내 이유 없이 가슴 한켠을 아려오게 한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고 외면하고 싶은 기억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역시 그런 과거를 애써 모른 척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그것을 직면함으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회피가 아닌 직면을 선택했을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메시지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전해진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주인공이 회상하는 기억들이 지닌 따뜻함이었다. 아픈 과거를 품고 있음에도, 장면들은 차분하고 다정하다. 우재와의 로맨스도 과하지 않게 스며들어 읽는 내내 은은한 설렘을 준다.

또 한 가지, 이 작품이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는 상처 입은 주인공이 그럼에도 잘 자랄 수 있었던 배경에 주변의 ‘다정함’이 있었다는 점이다. 언니를 잃고 독일로 건너온 어린 주인공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던 이모의 손길, 아이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하던 파독 이모들, 아픈 친구의 엄마를 웃게 해주려 애쓰던 친구들, 기억을 찾을 수 있도록 곁에서 격려해준 우재까지. 이 소설 속 다정함은 거창하지 않지만 분명하고, 그 작은 다정함들이 모여 한 사람이 무너지지 않고 결국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잔잔한 소설로 위로를 받고 싶은 분
✔️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을 찾는 분
✔️ 상처와 치유, 성장에 관한 이야기에 끌리는 분

『아트인문학: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

이 책을 읽고 나면 전시회를 두 배로 더 깊게 즐길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면, 보이는 것을 잘 보아야 한다.”

중세·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결정적 순간과 예술가들의 통찰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미술 기법과 시대별 주제를 친절하게 설명하고, 꼭 짚고 가야 할 작품들을 상세히 소개하면서도 당시 어떤 스타일과 색이 유행했는지 큰 흐름도 짚어준다. 현대미술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올바른 감상 태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실제로 이 책을 읽고 나서 전시회에 더 자주 가게 됐다. 이전보다 훨씬 풍부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알게 됐고, 보이는 것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몸소 체감한 책이다.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해부학을 공부했다는 이야기, 카라바조의 죽음에 얽힌 일화 같은 흥미로운 내용도 곳곳에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받는 기분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예술을 단순 감상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은 분
✔️ 전시회를 더 풍부하게 즐기고 싶은 분
✔️ 유럽 뮤지엄 투어를 앞둔 분

『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모든 고통이 사라진 세계에서, 진짜 인간다움과 자유는 무엇인지 묻는 디스토피아 소설.

“이곳에서 당신들이 누리는 그런 거짓된 가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차라리 불행해지고 싶은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뒤 미래를 상상한 소설인데, 1930년대에 쓰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현대적이다. 과학과 기술이 극도로 발달한 이 사회에서 인간은 인공적으로 생산되고, 태어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지며, 안정과 쾌락 속에서 살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다.

효율만이 중요하고 사사로운 감정은 불필요하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지금 우리의 삶은 이 세계에서 ‘야만인의 세계’로 불린다. 과연 그런 신세계를 ‘멋지다’고 할 수 있을까? 불행이 통제된 삶이 진정한 행복인지, 스스로 선택할 자유 없이 주어진 쾌락만 누리는 삶이 옳은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디스토피아 소설을 좋아하는 분
✔️ 고전 소설을 좋아하는 분 자유, 행복
✔️ 인간다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분

『휴머노이드』, 김상균

인간을 닮은 기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물음을 담았다.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본질과 미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을 닮아가는 기계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최근 피지컬 AI 개발에 대한 전 세계의 관심이 뜨겁다. 로봇주에 투자하는 개미로서(^_^) 꼭 읽어봐야겠다 싶어 펼쳤다. 책이 출간된 지 1년 남짓 됐는데, 그 사이 또 어마어마한 발전이 있었다는 사실이 책이 말하는 것을 직접 증명하는 것 같았다. 예측이 불가능할 만큼 빠른 속도다.

일론 머스크는 2040년까지 휴머노이드가 최대 100억 대까지 생산될 것이라 전망했다. 어릴 때 상상으로만 그리던 미래가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보며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든다. 책은 막연한 기대나 두려움 대신, 우리가 이 변화를 어떤 태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로봇이 일자리를 대체하더라도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 수 있다는 시각도 제시하며, 챕터마다 다양한 질문을 던져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AI에 관심 있는 분
✔️ 로봇과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가 궁금한 분
✔️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나의 태도를 점검하고 싶은 분

『여름은 고작 계절』, 김서해

미성숙할 수밖에 없는 어린 시절의 요동치는 감정과 관계를 담담한 문장으로 그린 소설.

“사랑은 자신을 조각내어 검열하고 상대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는 일이다. 수많은 단점을 골라내 억지로 감추거나 바꾸느라 자신의 초상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사랑할 때, 나는 가려지고 훼손된다.”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제니와 한나에게 “그렇게 눈치 보지 않아도 돼. 네 세상은 그게 전부가 아니야”라고 말해주고 싶었고, 얼른 제니가 한나의 손을 꼭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래서 마지막 한나의 이야기가 더욱 마음 아프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이 책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제니와 한나 사이의 우정이다. 단순히 서로를 좋아하고 의지하는 관계가 아니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서로를 견디고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에 가깝다. 동시에 이민자로서 겪는 인종차별과 젠더 편견에 대해서도 조용히 이야기한다. 작가는 “혐오스러운 자신을 참아내는 만큼 친구를 참아낼 수 있는 사람으로 길러보고 싶었다”고 했다. 내가 조금 더 어릴 때 이 책을 읽었다면, 나 자신과 타인에게 조금 더 다정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을까 싶었다.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 형광펜을 죽죽 그어가며 읽었고, 다음 여름에도 또 꺼내 읽고 싶은 책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감정의 결을 따라 천천히 읽고 싶은 분
✔️ 가족, 우정, 성장 과정의 상처를 돌아보고 싶은 분
✔️ 청소년기의 불완전한 관계와 감정에 공감하고 싶은 분

『모순』, 양귀자

인생의 수많은 선택과 모순을 그린 소설.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사랑이 아름답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이었다. 사랑은 바다만큼도 아름답지 않다. 그럼에도 사랑은 사랑이었다.

사랑이란, 발견할 수 있는 모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고 무심히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무엇이다.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책이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데, 읽어보면 그 이유를 바로 알게 된다. 책을 읽어보겠다는 사람에게 무조건 제일 먼저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다. 읽는 내내 작가의 글빨이 미쳤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주인공 안진진은 어느 날 결혼을 결심하는데, 그 앞에 두 남자가 있다. 계획대로 삶을 살아가는, 조금 재미없을 수 있지만 안정적인 미래를 함께 그릴 수 있는 나영규. 그리고 벌이는 부족하지만 낭만이 있고 마음이 더 기우는 김장우. 둘 중 누구를 선택할지 추측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이모’와 ‘엄마’의 삶이다. 쌍둥이로 태어나 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극명하게 다른 삶을 살아온 두 사람을 통해, 독자는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안진진의 선택과 삶의 방향, 그 모든 것에 모순이 있다. 하지만 원래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2회독할 때는 모든 내용이 다르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 소설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수많은 모순을 경험하며, 살아가면서 조금씩 깨달아가는 것. 그게 인생이라는 걸, 이 책은 조용히 알려준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로맨스를 좋아하는 분
✔️ 깊은 여운을 남기는 소설을 좋아하는 분
✔️ 삶의 선택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분

chap3. 독서 페어링 아이템

꽃갈피

꽃과 책을 사랑하는 나의 취향을 잘 아는 소중한 친구에게 선물 받은 아이템이다. 평소 꽃의 아름다움과 책의 깊이를 모두 아끼는 나를 위해 건네준 그 마음이 무척 고맙게 느껴진다.

나는 보통 늦은 밤 집에서, 혹은 주말 오후 카페에서 책을 조금씩 나누어 읽는 스타일이다.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책갈피가 꼭 필요한데, 그때마다 이 꽃갈피를 사용한다. 책장에 꽂힌 이 예쁜 아이를 볼 때마다 독서 시간이 한층 더 향기롭게 채워진다.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어두운 새벽녘에 눈을 뜬다. 밖은 비가 내렸는지 짙은 안개가 자욱했고 지끈지끈한 두통으로 인해 잠을 설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일어선다. 긴 하품과 함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다 피로해 보였고 그들도 삶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열차 소리와 방송 안내음 외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한 열차 안에서 나를 비롯한 그들은 스마트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시선은 언제나와 같이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액정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그렇게 도착역에 다 와갈 때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 강제로 종이를 급하게 쥐어주고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나에게 지금 뭘 전달하려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2 사내 캠페인 홍보지였다. [마인드 리셋 데이 : 3, 6, 9, 12월 넷째 주 금요일,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 직원에게 휴식을 권장합니다.] 처음엔 ‘우리 회사가 유급 휴가를?’ 같은 의심이 블라인드를 도배했지만, 이제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모두 아는 제도를 굳이 홍보할 이유가 있나? 자세히 보니 재작년 날짜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합병 전 로고도 눈에 띄었다. 뭐야,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이걸 왜… 나한테?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번 더 종이를 살폈다. 뒷면에도 흐릿한 글씨가 있었다. [대외비/ 담당자 외 열람 금지]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이전 분기 발생한 보안 사고를 고려하여, 일부 조치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급하게 출력한 듯 내용이 잘린 공문. 여백엔 빨간 색연필로 휘갈긴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무심코 종이를 문지른 손끝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마치 지장이라도 찍은 듯, 선명하게.

#3 사무실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출근 시간인데도 사람들의 대화는 줄었고, 다들 화면을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신저에는 “오늘 시스템이 자꾸 끊긴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왔다. 순간 아침에 본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설마… 우연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여백에 적힌 붉은 글씨가 어째서인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 “종이 받으셨죠? 이번 달은 당신 차례입니다.” “네? 뭐가 제 차례인가요?”라고 말하자 상대방이 말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죠?”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대답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통화 속 상대방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묘한 전화 통화를 뒤로하고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사무실 전체의 불이 잠시 깜빡이더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내 캠페인 홍보지를 받은 사람은 즉시 회사 밖으로 나오세요.” 놀란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이냐며 서로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눈치였다. 홍보지와 이상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 안내 방송은 결국, 나를 향한 경고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5 ‘뭔가 이상한 하루야’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아까 받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겨진 종이 아래 깔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요동치던 가슴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층으로 몸을 피했다. 어둡고 쾌쾌한 공기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치한 곳은 23층과 22층 사이, 바로 22.5층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 그것은 분명 내가 방금 전에 받은 그 종이와 똑같았다. “너도 받은 거야?”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표정은 차갑고, 마치 내가 말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다 받았다는 게 문제야.” 그는 종이를 펼쳤다.

#6 – 이번 달엔 뭘 할래? 내가 받은 종이에 있던 것과 같은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는 정보로 뒤죽박죽이었다. 오늘은 회사 지정 ‘마인드 리셋 데이’도 아니었는데 기록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사내 홍보지도 우리 둘에게만 온 듯했다. 또 이 남자는 누구지?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었지?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은 무슨 말일까?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남자였다. “이 짓을 몇 번이나 해도 생각 많은 건 여전하네.” “뭐라고?” “……아냐.” 남자는 잠시 말을 삼키더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 안내방송에서 나오라고 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왠지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는 먼저 비상계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 또한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7 비상계단을 벗어나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옥 깊숙이 숨겨진 낯선 전산실이었다. 서버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 사이로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컴퓨터와 연결된 프린터가 쉴 새 없이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종이 위에는 소름 끼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내가 비상계단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지금 이 방에 발을 들인 순간의 묘사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모니터 위에서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이번 달엔 뭘 할래? : 당신의 선택] “이게 대체 다 뭐야? 어떻게 우리가 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서가던 남자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망설일 시간 없어. 시스템이 복구되면 이 기회도 사라질 테니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써.” 나는 홀린 듯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일었다. 자판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 사이로, 삼켜왔던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첫 자판을 내리눌렀다. 타닥. 정적을 깨는 둔탁한 타건음과 함께, 나의 비밀스러운 소망이 화면 위로 한 글자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8 추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타닥.
화면 위에 찍힌 첫 문장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당장 퇴근한다.]

순간 프린터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종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는 곧장 종이를 집어 들고 내가 쓴 문장을 읽더니 작게 비웃었다. “푸핫. 겨우 그거야? 이 엄청난 시스템에 쓰는 바람이 고작 ‘퇴근’이라고? 하지만 역시, 다들 처음엔 그걸 쓰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 더미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한 번씩 선택을 했어.” 남자가 모니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의 붉은 글씨가 바뀌었다.

[선택 확인: 퇴근한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59]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10분 안에 네가 진짜로 퇴근하지 못하면, 시스템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 선택을 완수할 거야.” “다른 방식…?”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뭐, 예를 들면… 회사가 사라진다든지.”

그 순간, 건물 어딘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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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추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가볍게 펼쳤다가 생각보다 오래 남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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