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여름 큐레이터의 취향 책방

chap1. 취향을 말하다

『쓰기의 말들』, 은유

“좋은 글도 여기에 빗대어 본다. 잘 지은 한옥이 변화무쌍한 날씨, 다채로운 풍광을 넉넉히 받아 내고 삶을 키워 내듯, 내가 아는 좋은 글도 담아 내고 살려 낸다. 달아나는 생각, 숨어 있는 감정,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던 욕망 같은 것까지.”

은유의 『쓰기의 말들』은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술서라기보다, 이따금 우리가 왜 기록하고 써야 하는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책에 가깝다. 우리는 보통 글쓰기를 결과물로 생각하지만, 이 책은 그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무언가를 쓰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일이고, 지나온 시간을 다시 해석하는 일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록에 가깝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솔직하게 써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고개를 든다. 그렇게 한 줄을 꾹꾹 눌러 쓰고 나면, 그날의 감정이 조금은 또렷해진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글을 쓰고 싶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한 분
✔️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정리하는 게 어려운 분
✔️ 하루를 조금 더 깊이 돌아보고 싶은 분

『태도의 말들』, 엄지혜

“행복감을 ‘자주’ 느낄 수 있는 재주, 마음의 태도는 어디에서 올까. 자신을 잘 아는 능력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엄지혜의 『태도의 말들』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선택들이 결국 삶을 만들어간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는 종종 큰 결심이나 특별한 계기가 있어야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만, 이 책은 그보다 매일 반복되는 태도에 주목한다. 일을 대하는 마음,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까지. 그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어떤 태도로 하루를 보내고 있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특별히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가슴속에 더 오래 남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일상에 새로운 방향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분
✔️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잡고 싶은 분
✔️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 중인 분

『생각의 말들』, 장석훈

“삶이란 죽음과 죽음이라는 두 영원 사이에 놓인 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간 안에서도 의식적 사고가 지속되는 것은 찰나에 불과하다. 사유란 기나긴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섬광 같은 것. 그런데 이 섬광이야말로 전부다.”

장석훈의 『생각의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쉽게 ‘생각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정작 스스로 깊이 사유하는 시간은 부족한 요즘 같은 때에 더욱 와닿는 이야기다.

이 책은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연하게 여겼던 생각들을 한 번쯤 의심해보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연습을 하게 만든다. 빠르게 결론을 내리기보다 조금 더 오래 고민해 보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생각의 힘이라는 것을 조용히 짚어준다. 읽고 난 뒤 당장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판단할 때 한 템포 멈추어 서게 된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가 결국 전혀 다른 선택으로 이어진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싶은 분
✔️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분
✔️ 자신만의 단단한 기준을 만들고 싶은 분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이석원

인간을 닮은 기계가 우리에게 던지는 본질적인 물음을 담았다.

“‘내 삶의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일.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서.”

이석원의 『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은 앞선 책들과는 조금 다른 결로 다가온다. 이 책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기보다, 우리가 이미 지나온 시간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특별한 사건이 없어도 평범한 하루 속에는 충분히 많은 감정이 일렁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나간 관계, 빛바랜 기억,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 같은 것들 말이다. 읽다 보면 “나도 이런 순간이 있었지” 하고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이 책은 위로를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곁에 앉아 체온을 나누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더 오래 머리맡에 두고 싶은 책이 된다. 이석원의 산문집 시리즈는 가만히 밑줄을 긋게 만드는 담백한 문장들이 많아, 읽고 나면 잔잔한 여운이 머릿속을 맴돈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조용한 위로가 필요한 분
✔️ 혼자 있는 시간이 낯설지 않고 편안한 분
✔️ 깊은 밤, 머리맡에서 읽을 책을 찾고 있는 분

『여행의 이유』, 김영하

“여행이 내 인생이었고, 인생이 곧 여행이었다. 우리는 모두 여행자이며, 타인의 신뢰와 환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는 유명한 여행지를 소개하는 가이드북이 아니라, 우리가 왜 끊임없이 떠나고 또다시 돌아오는지를 사유하게 만드는 책이다. 여행은 낯선 풍경을 보는 일이기도 하지만, 익숙했던 나 자신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여행의 설렘만을 찬미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겪는 불편함, 예상치 못한 사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순간들까지도 여행의 당연한 일부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보통 여행을 단순한 쉼이나 즐거움으로 여기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여행이 꼭 행복한 순간으로만 채워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오히려 낯선 장소에서 길을 잃고, 당혹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는 과정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욱 분명해진다.

김영하의 문장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 여행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담담하게 풀어나가면서도, 그 안에 삶과 기억, 상실과 회복에 대한 통찰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나는 왜 그토록 떠나고 싶어 했을까?”라는 질문이 마음을 두드린다. 어쩌면 여행의 이유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잠시 다른 공간에 데려다 놓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여행을 좋아하지만 그 근본적인 이유를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분
✔️ 답답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고르고 싶은 분
✔️ 낯선 장소에서 자신을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을 즐기는 분

chap3. 독서 페어링 아이템

연필, 형광펜, 인덱스 스티커!

종이에 연필로 줄을 그을 때 나는 서겁서걱한 소리를 무척 좋아한다. 책을 새로 사면 깨끗하게 보존하며 읽고 싶은 마음과, 마구 밑줄을 쳐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체화하며 읽고 싶은 마음이 늘 공존한다. 하지만 책을 너무 모시듯 조심조심 읽으면 머릿속에 남는 구절이 없어 아쉬울 때가 많았다.

책에 줄을 긋다 보니 나름의 규칙도 생겼다. 정말 가슴을 치는 최고의 문장에는 형광펜을 칠하고, 적당히 좋은 문장에는 연필로 마구 줄을 긋는다. 또한 머릿속에 두고두고 담아두고 사유할 페이지에는 인덱스 스티커를 붙여둔다. 그렇게 흔적을 남기다 보면 내가 좋아하는 문장들의 결이 서로 닮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는 정말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연필로 한 땀 한 땀 필사를 하기도 했다.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는 하지만 공수가 꽤 많이 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인덱스 스티커로 문장들을 갈무리하며 살피는 편이다. 날이 좋은 날이면 가방에 책 한 권과 인덱스 스티커, 펜, 형광펜을 툭 집어넣고 카페로 향한다. 읽는 속도는 비록 더디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온전히 내 것으로 담아내기 위해서다.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어두운 새벽녘에 눈을 뜬다. 밖은 비가 내렸는지 짙은 안개가 자욱했고 지끈지끈한 두통으로 인해 잠을 설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일어선다. 긴 하품과 함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주섬주섬 옷가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다 피로해 보였고 그들도 삶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열차 소리와 방송 안내음 외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한 열차 안에서 나를 비롯한 그들은 스마트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시선은 언제나와 같이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직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액정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 그렇게 도착역에 다 와갈 때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 강제로 종이를 급하게 쥐어주고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나에게 지금 뭘 전달하려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2 사내 캠페인 홍보지였다. [마인드 리셋 데이 : 3, 6, 9, 12월 넷째 주 금요일,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 직원에게 휴식을 권장합니다.] 처음엔 ‘우리 회사가 유급 휴가를?’ 같은 의심이 블라인드를 도배했지만, 이제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모두 아는 제도를 굳이 홍보할 이유가 있나? 자세히 보니 재작년 날짜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합병 전 로고도 눈에 띄었다. 뭐야,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이걸 왜… 나한테?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번 더 종이를 살폈다. 뒷면에도 흐릿한 글씨가 있었다. [대외비/ 담당자 외 열람 금지]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이전 분기 발생한 보안 사고를 고려하여, 일부 조치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급하게 출력한 듯 내용이 잘린 공문. 여백엔 빨간 색연필로 휘갈긴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무심코 종이를 문지른 손끝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마치 지장이라도 찍은 듯, 선명하게.

#3 사무실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출근 시간인데도 사람들의 대화는 줄었고, 다들 화면을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신저에는 “오늘 시스템이 자꾸 끊긴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왔다. 순간 아침에 본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설마… 우연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여백에 적힌 붉은 글씨가 어째서인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 “종이 받으셨죠? 이번 달은 당신 차례입니다.” “네? 뭐가 제 차례인가요?”라고 말하자 상대방이 말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죠?”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대답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통화 속 상대방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묘한 전화 통화를 뒤로하고 회사에 도착하니, 동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사무실 전체의 불이 잠시 깜빡이더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내 캠페인 홍보지를 받은 사람은 즉시 회사 밖으로 나오세요.” 놀란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슨 일이냐며 서로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눈치였다. 홍보지와 이상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 안내 방송은 결국, 나를 향한 경고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5 ‘뭔가 이상한 하루야’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아까 받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겨진 종이 아래 깔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요동치던 가슴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층으로 몸을 피했다. 어둡고 쾌쾌한 공기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치한 곳은 23층과 22층 사이, 바로 22.5층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 그것은 분명 내가 방금 전에 받은 그 종이와 똑같았다. “너도 받은 거야?” 내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표정은 차갑고, 마치 내가 말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다 받았다는 게 문제야.” 그는 종이를 펼쳤다.

#6 – 이번 달엔 뭘 할래? 내가 받은 종이에 있던 것과 같은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는 정보로 뒤죽박죽이었다. 오늘은 회사 지정 ‘마인드 리셋 데이’도 아니었는데 기록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고, 사내 홍보지도 우리 둘에게만 온 듯했다. 또 이 남자는 누구지?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었지?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은 무슨 말일까?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남자였다. “이 짓을 몇 번이나 해도 생각 많은 건 여전하네.” “뭐라고?” “……아냐.” 남자는 잠시 말을 삼키더니 “일단 밖으로 나가자. 안내방송에서 나오라고 했으니까.”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왠지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는 먼저 비상계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 또한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7 비상계단을 벗어나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옥 깊숙이 숨겨진 낯선 전산실이었다. 서버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 사이로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컴퓨터와 연결된 프린터가 쉴 새 없이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종이 위에는 소름 끼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내가 비상계단에서 나누었던 대화와 지금 이 방에 발을 들인 순간의 묘사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문장은 모니터 위에서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이번 달엔 뭘 할래? : 당신의 선택] “이게 대체 다 뭐야? 어떻게 우리가 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서가던 남자가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망설일 시간 없어. 시스템이 복구되면 이 기회도 사라질 테니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써.” 나는 홀린 듯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일었다. 자판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 사이로, 삼켜왔던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첫 자판을 내리눌렀다. 타닥. 정적을 깨는 둔탁한 타건음과 함께, 나의 비밀스러운 소망이 화면 위로 한 글자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8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타닥. 화면 위에 찍힌 첫 문장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당장 퇴근한다.] 순간 프린터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고, 종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는 곧장 종이를 집어 들고 내가 쓴 문장을 읽더니 작게 비웃었다. “푸핫. 겨우 그거야? 이 엄청난 시스템에 쓰는 바람이 고작 ‘퇴근’이라고? 하지만 역시, 다들 처음엔 그걸 쓰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 더미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한 번씩 선택을 했어.” 남자가 모니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의 붉은 글씨가 바뀌었다. [선택 확인: 퇴근한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59]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10분 안에 네가 진짜로 퇴근하지 못하면, 시스템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 선택을 완수할 거야.” “다른 방식…?”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뭐, 예를 들면… 회사가 사라진다든지.” 그 순간, 건물 어딘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9 여름

경보음이 사옥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모니터 속 숫자는 인정사정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 00:09:41]

“그냥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은 네가 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쓸 때의 ‘마음’을 실행해.”

그 순간 전산실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내 팔을 붙잡고 뒷문으로 달렸다. 좁고 어두운 통로 끝에는 낡은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퇴근 처리실]

문 옆 벽면에는 빛바랜 명단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이 여러 번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3월, 6월, 9월, 12월…… 그리고 이번 달.
“나……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어?”
남자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 00:05:12]

문 안쪽에서 아침에 들었던 바로 그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으셨네요. 이번 달 담당자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문을 열면, 모든 게 기억나게 될 거야.”
딸깍.

문이 열리자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 속에 일제히 내가 나타났다. 종이를 건네받는 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나, 위태로운 선택을 하는 나.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나와 함께 도망쳐온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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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하루에 하나씩 작은 재미로 채우려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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