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북네필 큐레이터의 취향 책방

chap1. 취향을 말하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

나치 점령기하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용기와 온기가 담긴 서간체 힐링 소설. 책이 가진 힘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리가 되어주곤 합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엿보았고,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인간다운 존엄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편지 형태로 이어지는 따스한 소설로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추천하는 책.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핍박당하던 건지섬 주민들이 어떻게 그 시련을 함께 견뎌나가는지를 읽다보면, 우리나라가 겪었던 일제강점기가 떠올라 감정이입이 된다. 게다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책’이 아주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하기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즐겁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사이드로 작게 곁들여진 로맨스 요소 역시 재미를 더해준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팍팍한 삶에서 MSG 없이 잔잔하고 편안한 힐링이 필요한 분
✔️ 공동체의 힘이나 용서, 사랑과 같은 가치를 믿는 분
✔️ 『키다리 아저씨』 같은 서간체 소설이 취향이라 더 읽어보고 싶은 분

『저소비 생활』 가제노타미

무조건 돈을 덜 쓰는, 무식한 절약이 아니라 현명한 소비를 통해 나답고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삶에 대한 노하우를 다룬 실용서.

“경제적인 불안은 나 자신을 잃게 하고, 불확실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리저리 휩쓸려 돈을 쓰다 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 같은 어렵고 무겁게 느껴지는 재테크가 아니라, 좀 더 친근하면서도 쉬운 ‘절약’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어 읽었던 책. 단순히 돈을 많이 쓰고 적게 쓰느냐에서 벗어나,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가 라든가 어떻게 하면 더 나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까지 할 수 있게 해주어서 작가에게 참 고마웠다. 작고 가벼운 책이라는 점도 바쁜 직장인에게 여러모로 플러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무섭게 치솟는 물가와 범람하는 AI, 지나친 FOMO 속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고픈 분
✔️ 필요가 없는데도 무심코 혹은 기분 전환으로 돈을 쓰게 되어 어려움을 겪는 분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큰 분
✔️ 편법이나 치트키보다는 정석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싶으신 분

『마음 가면』 브레네 브라운

불확실성, 위험, 불안, 완벽주의를 이겨내고 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에 대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 책. 그대로 실천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래도 오늘같이 불확실성이 강한 시대에 한번쯤 읽어봄직하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결코 충분하지 않다는 메시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불확실하다. 사랑은 무척 위험하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는 감정을 노출한다. (중략)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지도 않는 삶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어둠을 탐색할 용기가 있어야 우리가 가진 빛의 무한한 힘을 발견할 수 있다.”

브레네 브라운의 TED Talk “취약하다는 것의 힘”과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를 연달아 보고 무척 감동받아 구매했던 책. 그녀가 평생 동안 연구해온 ‘수치심’이 어떻게 우리를 잡아먹고 서로를 공격하게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드러내고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지를 다루고 있다.
(꼭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녀가 출연하는 TED Talk 영상들을 한번쯤 봐줬으면 한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스스로가 자꾸만 부족하게 느껴지는, 완벽주의에 시달리는 분
✔️ 관계에서 상처를 많이 받아 ‘마음 가면’을 쓰기 시작한 분
✔️ 좀 더 건강한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싶으신 분
✔️ TED Talk 영상을 보니 울림이 있어 수치심과 취약성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분

『동경일일』 마츠모토 타이요

포기했다고 생각했던 꿈에 다시 손을 뻗어보려 애쓰는 만화 편집자와 만화가들의 이야기.
사회에서 ‘한물갔다’, ‘늙다리다’, ‘시류에 맞지 않는다’ 같은 취급을 받던 언더독들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발버둥.

“좋아하던 게 전부 사라지는 것만 같아…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버린다고….”
“저는 당신의 요령 없는 만화를 좋아했어요. 카에루 씨는 자신의 작품을 졸작이라 치부하시는 것 같지만… 당신의 만화가 제게 손을 내밀어주는 듯한 기분을 몇 번이고 느꼈습니다. 많지 않을지라도… 저 같은 독자에게 당신의 만화를 전하고 싶었어요.”

『핑퐁』으로 유명한 마츠모토 타이요가 비교적 최근에 출간한 만화. 작품의 메시지부터 연출, 대사까지 무엇 하나 빠짐없이 최선을 다해 날을 벼린 것이 느껴져 읽는 내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까웠다. ‘내 전성기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 ‘나의 꿈을 이룰 날은 결코 없지 않을까?’ 같은 의심과 회의에 시달린다면, 만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의 희로애락에 고스란히 젖어들며 치유받을 수 있을 것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어가는 것 같아 초조하고 답답한 30대 이상
✔️ 만화와 출판의 세계를 사랑하고 애정하는 독자
✔️ 다소 정적인 흐름 속에서도 강한 울림이 있는 만화를 원하는 분 (『룩백』, 『중쇄를 찍자!』 등)
✔️ 일본 만화에 대한 편견이 있어 그간 읽지 않으셨던 분

『광마회귀』 유진성

웹소설에 대한 편견을 깨부숴주는 압도적인 필력의 무협 장르 웹소설.
‘무’보다 ‘협’에 강점을 맞추며 정형화된 무협 세계관을 새롭게 해석한 점이 참신하다.

“한때의 강함을 누구에게 자랑하겠소.”
“정답이 어디 있겠소? 하루에 열두 번은 더 후회하고, 서너 번은 부끄럽고, 두세 번은 실소가 터지고 있소. 그러나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내가 살려준 놈들이 어디서 무얼할까 생각하고 있소.”
“나는 고작 나답게 살기 위해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왔나.”

흔히 웹소설이라고 하면 귀한 가문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온갖 기연을 얻어 승승장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1인자가 되는 과정을 그릴 때가 많다. 혹은 과거로 돌아가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악연들보다 강해져서 그들을 손쉽게 해치워 버리기도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반대로 무협 세계의 밑바닥 중 밑바닥, 객잔 점소이(현대로 치면 선술집 점원) 출신이다. 강자에게 툭하면 맞고 빼앗기는 것에 대한 설움을 알고 있어, 무공을 얻는 대로 과거의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약자와 평범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와중에 과거의 악연을 재회하더라도 갱생의 여지가 있으면 두 번째 기회를 주기 위해 애쓴다. 그러면서도 너무 정의로운 티를 내지 않는 데다가, 유머러스한 부분도 충분히 챙겨준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작품들이 쉽게 모방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어떤 전개를 예상하더라도 그것을 능가하여 새로운 재미를 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너무 일찍 읽어버린 것이 아쉽다. 이런 소설을 한 번 읽으니 다른 웹소설에서 재미를 느끼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자면 같은 작가님의 『칼에 취한 밤을 걷다』, 후로스트 작가의 『변방의 외노자』 정도.)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어지간한 유명 웹소설을 다 읽어봐 신선한 글이 읽고 싶은 분
✔️ 반대로 웹소설에 대한 편견이 있어 아직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분
✔️ 단순한 먼치킨물보다는 의와 협,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철학이 담긴 소설이 읽고 싶은 분
✔️ 그러면서도 웃음과 기분 전환도 확실히 챙기고 싶은 분

chap3. 독서 페어링 아이템

3색 볼펜

사이토 다카시의 ‘3색 볼펜 독서법’을 알게 된 후로 비문학 책을 읽을 때 주로 사용하는 독서 도구. 빨간색은 가장 중요한 핵심, 파란색은 어느 정도 중요한 부분, 초록색은 내가 개인적으로 흥미를 느끼거나 마음에 드는 문장에 긋는다. 책에 좀 더 집중하며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중에 돌이켜 핵심을 요약하기에도 유용하다. (관련 책:『3색볼펜 읽기 공부법』, 『쓰지 않으면 아이디어는 사라진다』)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어두운 새벽녘에 눈을 뜬다.

밖은 비가 내렸는지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지끈지끈한 두통으로 잠을 설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긴 하품과 함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다 피로해 보였다.

그들도 삶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열차 소리와 방송 안내음 외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한 열차 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스마트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시선은 언제나와 같이 스마트폰을 향해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액정에만 시선을 둔다.

그렇게 도착역에 다 와갈 때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 강제로 종이를 쥐여주고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나에게 지금 뭘 전달하려는 거지?’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2

사내 캠페인 홍보지였다.

[마인드 리셋 데이]
3, 6, 9, 12월 넷째 주 금요일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 직원에게 휴식을 권장합니다.

처음엔 ‘우리 회사가 유급 휴가를?’ 같은 의심이 블라인드를 도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모두 아는 제도를 굳이 홍보할 이유가 있나?

자세히 보니 재작년 날짜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합병 전 로고도 눈에 띄었다.

뭐야,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이걸 왜…… 나한테?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번 더 종이를 살폈다.

[대외비 / 담당자 외 열람 금지]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이전 분기 발생한 보안 사고를 고려하여, 일부 조치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급하게 출력한 듯 내용이 잘린 공문.

여백엔 빨간 색연필로 휘갈긴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무심코 종이를 문지른 손끝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마치 지장이라도 찍은 듯, 선명하게.

#3

사무실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출근 시간인데도 사람들의 대화는 줄어 있었다.

다들 화면을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신저에는 “오늘 시스템이 자꾸 끊긴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왔다.

순간 아침에 본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설마…… 우연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여백에 적힌 붉은 글씨가 어째서인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

“종이 받으셨죠?”

“이번 달은 당신 차례입니다.”

“네?”

“뭐가 제 차례인가요?”

상대방이 말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죠?”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대답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통화 속 상대방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묘한 전화 통화를 뒤로하고 회사에 도착했다.

동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사무실 전체의 불이 잠시 깜빡였다.

곧이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내 캠페인 홍보지를 받은 사람은
즉시 회사 밖으로 나오세요.

놀란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며 서로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눈치였다.

홍보지와 이상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 안내 방송은 결국, 나를 향한 경고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5

‘뭔가 이상한 하루야.’

조심스럽게 아까 받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겨진 종이 아래 깔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요동치던 가슴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층으로 몸을 피했다.

어둡고 쾌쾌한 공기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치한 곳은 23층과 22층 사이.

바로 22.5층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

그것은 분명 내가 방금 전에 받은 그 종이와 똑같았다.

“너도 받은 거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다.

마치 내가 말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다 받았다는 게 문제야.”

그는 종이를 펼쳤다.

#6
– 이번 달엔 뭘 할래?

내가 받은 종이에 있던 것과 같은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는 정보로 뒤죽박죽이었다.

오늘은 회사 지정 ‘마인드 리셋 데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록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 홍보지도 우리 둘에게만 온 듯했다.

또 이 남자는 누구지?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었지?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은 무슨 말일까?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남자였다.

“이 짓을 몇 번이나 해도 생각 많은 건 여전하네.”

“뭐라고?”

“……아냐.”

남자는 잠시 말을 삼켰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안내방송에서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말을 듣자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왠지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는 먼저 비상계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 또한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7

비상계단을 벗어나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옥 깊숙이 숨겨진 낯선 전산실이었다.

서버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 사이로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컴퓨터.

그와 연결된 프린터가 쉴 새 없이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종이 위에는 소름 끼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내가 비상계단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지금 이 방에 발을 들인 순간의 묘사.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모니터 위에서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이번 달엔 뭘 할래? : 당신의 선택]

“이게 대체 다 뭐야?”

“어떻게 우리가 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서가던 남자가 멈춰 섰다.

그는 나를 돌아보았다.

“망설일 시간 없어.”

“시스템이 복구되면 이 기회도 사라질 테니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써.”

나는 홀린 듯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일었다.

자판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

그 사이로 삼켜왔던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첫 자판을 내리눌렀다.

타닥.

정적을 깨는 둔탁한 타건음과 함께, 나의 비밀스러운 소망이 화면 위로 한 글자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8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타닥.

화면 위에 찍힌 첫 문장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당장 퇴근한다.]

순간 프린터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종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는 곧장 종이를 집어 들고 내가 쓴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작게 비웃었다.

“푸핫. 겨우 그거야?”

“이 엄청난 시스템에 쓰는 바람이 고작 ‘퇴근’이라고?”

“하지만 역시, 다들 처음엔 그걸 쓰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 더미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한 번씩 선택을 했어.”

남자가 모니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의 붉은 글씨가 바뀌었다.

[선택 확인 : 퇴근한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59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10분 안에 네가 진짜로 퇴근하지 못하면, 시스템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 선택을 완수할 거야.”

“다른 방식……?”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뭐, 예를 들면…… 회사가 사라진다든지.”

그 순간, 건물 어딘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9

경보음이 사옥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모니터 속 숫자는 인정사정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41

“그냥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은 네가 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쓸 때의 ‘마음’을 실행해.”

그 순간 전산실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내 팔을 붙잡고 뒷문으로 달렸다.

좁고 어두운 통로 끝에는 낡은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퇴근 처리실]

문 옆 벽면에는 빛바랜 명단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이 여러 번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3월, 6월, 9월, 12월…….

그리고 이번 달.

“나……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어?”

남자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5:12

문 안쪽에서 아침에 들었던 바로 그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으셨네요.”

“이번 달 담당자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문을 열면, 모든 게 기억나게 될 거야.”

딸깍.

문이 열리자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 속에 일제히 내가 나타났다.

종이를 건네받는 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나.

위태로운 선택을 하는 나.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나와 함께 도망쳐온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10

문이 열리자 좁은 방 안 가득 모니터 불빛이 번쩍였다.

화면마다 서로 다른 ‘나’가 있었다.

누군가는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또 다른 나는 멍하니 키보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비상계단에서 만난 남자와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스템은 사람들의 선택을 현실로 만드는 장치야.”

“넌 이미 여러 번 여기 왔었어.”

믿기 어려웠지만 벽에 붙은 기록 속에는 내 이름이 반복해서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경보음이 울렸다.

화면에는 남은 시간이 떠올랐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0:30

남자는 내게 마지막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예전의 나는 늘 “퇴근한다”라고 적었다고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닥.

[반복을 끝낸다.]

문장을 입력하는 순간 전산실의 불빛이 차례로 꺼졌다.

모니터 속 수많은 ‘나’도 하나씩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는 붉은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걸까…….”

#11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눈앞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얼굴은 이토록 또렷한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소속도, 심지어 정말 회사 사람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직원 검색창을 열어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씩 입력해 보았다.

[전산실]
검색 결과 없음
[퇴근 처리실]
검색 결과 없음

그래.

나올 리가 없지.

팽팽하게 조여 있던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밀려왔다.

결국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 채 퇴근 시간이 찾아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사원증으로 향했다.

이름을 읽으려던 순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비상계단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남자가 그들 사이에 섞여 탔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닫혀 가는 문만 바라보았다.

문이 거의 닫히려는 순간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모양만큼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12

‘도’

‘망’

‘쳐’

굳어버린 머리로 각 음절을 합쳐 겨우 뜻을 이해하자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치라니, 그게 무슨 의미야? 누구로부터? 어디로? …그리고 왜?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기 위해 버튼을 다급하게 눌러봤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친 승강기는 야속하게도 벌써 다른 층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어디서 내릴지 확인하기 위해 붉은 숫자를 확인하던 나는 금방 포기하고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는 여러 층에서 멈춰서고 있었고, 그 많은 층을 나 혼자 뒤지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잠깐.”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분명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와 복도에는 모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CCTV를 확인하면 남자의 얼굴뿐 아니라 어느 층에서 내려 어느 팀으로 갔는지, 이 수수께끼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수많은 모니터들이 설치된 보안실에 방문하려니, 얼마 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전산실에서의 상황이 오버랩되어 꺼려졌다. 게다가 남자가 만약 아군이라면 나는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 박스 안을 스크롤하면 전체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북네필

활자를 집어 삼키는 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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