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맴묘 큐레이터의 취향 책방

chap1. 취향을 말하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소녀 카야의 성장 이야기.

“카야는 죽은 칠면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카모어 잎으로 눈을 덮어주었다.”

가족에게 버려진 채 습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카야의 이야기다.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을 중심으로 로맨스와 미스터리 요소가 어우러져 있어 카야의 삶 전체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카야와 같은 삶을 경험한 적은 없지만, 그가 느끼는 외로움과 성장 과정에서 마주하는 감정에는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주인공이 된 듯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카야의 삶과 감정이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다. 한 인물의 삶을 따라가며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성장소설을 찾고 있다면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 자연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 몰입감 있는 장편소설을 찾는 사람

『아침이 온다』 츠지무라 미즈키

긴 밤을 지나 결국 아침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러나 아침이 왔다. 끝없이 이어지는 밤의 밑바닥을 걸어, 빛 하나 없는 터널을 빠져나왔다.”

입양을 둘러싼 여러 인물의 시점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같은 사건을 마주한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상처와 사정을 품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알아갈수록 누구의 입장도 쉽게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감춰져 있던 인물들의 감정이 차례로 드러난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럼에도 계속 다음 장을 넘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특히 “그러나 아침이 왔다”라는 문장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책을 끝까지 읽고 나니 제목이 왜 ‘아침이 온다’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는 끝나지 않을 듯 길고 어두운 밤일지라도 결국 아침은 찾아온다는 사실이 위로가 됐다. 그 위로를 다른 사람과도 나누고 싶어 이 책을 추천한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감정선이 깊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 책을 덮은 뒤에도 여운이 남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
✔️ 인간관계와 가족을 다룬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

『키르케』 매들린 밀러

신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선택해 가는 키르케의 이야기.

“무한한 능력을 소유한, 자기 자신 말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답을 할 필요가 없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지만 신들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키르케가 자신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익숙한 그리스 신화 속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영웅들의 활약보다는 키르케라는 한 인물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스 신화를 좋아해 읽기 시작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인간적인 이야기였다. 다른 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기도 하는 키르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흔들리던 키르케가 점차 스스로 삶의 방향을 선택해 가는 과정도 인상 깊었다. 익숙한 신화를 새로운 인물의 시선으로 만나고 싶다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그리스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
✔️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 한 인물의 긴 삶과 성장을 따라가는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

『네 명의 완벽주의자』 이동귀·손하림·김서영

완벽주의라는 마음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도록 도와준 책.

“칸트는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 354가지와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350가지를 찾아냈고, 이점이 더 크다는 것을 확인한 후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은 완벽주의를 단순히 장점이나 단점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완벽주의를 여러 유형으로 나누고, 유형에 따라 생각하는 방식과 행동 패턴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설명한다. 구체적인 사례가 다양하게 담겨 있어 심리학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내용을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자신의 모습과 연결해볼 수 있다.

평소 ‘왜 나는 이런 부분에 유독 예민할까?’, ‘왜 결과보다 과정에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까?’와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품었던 질문의 답을 조금씩 찾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분석하기보다 나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는 점도 좋았다. 완벽주의에서 벗어나는 방법만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고 적절히 활용하는 방법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를 조금 더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책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사람
✔️ 자기 이해에 관심이 많은 사람
✔️ 심리학은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

『면도날』 서머싯 몸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한 사람의 길고 깊은 질문.

“그땐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자문했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제1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청년 래리의 이야기다. 주변 사람들이 안정적인 직업과 사회적 성공을 향해 나아갈 때, 래리는 자신만의 답을 찾기 위해 그들과 다른 길을 선택한다. 책은 래리와 주변 인물들의 삶을 통해 행복과 성공, 신념과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이 좋았던 가장 큰 이유는 삶에 관한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삶의 목적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읽는 동안 밑줄을 긋고 싶은 문장도 많았고, 책장을 덮은 뒤에도 문득 다시 펼쳐보고 싶어졌다. 빠르게 답을 얻기보다 오랫동안 질문을 품고 생각해보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이 책,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책을 찾는 사람
✔️ 삶의 방향과 의미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
✔️ 서로 다른 삶의 가치관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

chap3. 독서 페어링 아이템

헤드폰

주로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잠들기 전 침대에서 책을 읽는다. 이때 책의 분위기와 맞는 음악을 들으면 책에 더 몰입할 수 있다. 그래서 독서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아이템은 헤드셋이다. 노래는 책을 이미 읽어본 사람에게 추천받기도 하고, 실사화된 작품이라면 해당 작품의 OST를 듣기도 한다. 게다가 노이즈 캔슬링 기능까지 갖춰 소음이 심한 전철 안에서도 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오늘, 시끄러운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어두운 새벽녘에 눈을 뜬다.

밖은 비가 내렸는지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지끈지끈한 두통으로 잠을 설친 나는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긴 하품과 함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뜨거운 물에 샤워를 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입고 출근을 한다.

출근길에 마주치는 사람들은 나와 같이 다 피로해 보였다.

그들도 삶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열차 소리와 방송 안내음 외에는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한 열차 안.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스마트폰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시선은 언제나와 같이 스마트폰을 향해 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직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액정에만 시선을 둔다.

그렇게 도착역에 다 와갈 때쯤.

누군가가 나에게 손을 뻗어 강제로 종이를 쥐여주고 사라졌다.

‘이건 무슨 일이지?’

‘나에게 지금 뭘 전달하려는 거지?’

종이를 펼쳐 보니 그것은…….

#2

사내 캠페인 홍보지였다.

[마인드 리셋 데이]
3, 6, 9, 12월 넷째 주 금요일
필수 인원을 제외한 전 직원에게 휴식을 권장합니다.

처음엔 ‘우리 회사가 유급 휴가를?’ 같은 의심이 블라인드를 도배했다.

하지만 이제는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웠다.

모두 아는 제도를 굳이 홍보할 이유가 있나?

자세히 보니 재작년 날짜였다.

지금은 쓰지 않는 합병 전 로고도 눈에 띄었다.

뭐야, 우리 회사 사람이었어?

이걸 왜…… 나한테?

빠르게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번 더 종이를 살폈다.

[대외비 / 담당자 외 열람 금지]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이전 분기 발생한 보안 사고를 고려하여, 일부 조치가 다음과 같이 변경되었습니다.

급하게 출력한 듯 내용이 잘린 공문.

여백엔 빨간 색연필로 휘갈긴 글씨가 한 줄 적혀 있었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무심코 종이를 문지른 손끝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마치 지장이라도 찍은 듯, 선명하게.

#3

사무실에 도착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달랐다.

출근 시간인데도 사람들의 대화는 줄어 있었다.

다들 화면을 바라보며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신저에는 “오늘 시스템이 자꾸 끊긴다”는 메시지가 줄줄이 올라왔다.

순간 아침에 본 문구가 떠올랐다.

[해당 일자에는 사옥 내 모든 기록 시스템이 일시 정지됩니다.]

설마…… 우연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종이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여백에 적힌 붉은 글씨가 어째서인지 더 선명하게 보였다.

– 이번 달엔 뭘 할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망설이다 전화를 받자,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4

“종이 받으셨죠?”

“이번 달은 당신 차례입니다.”

“네?”

“뭐가 제 차례인가요?”

상대방이 말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죠?”

그 질문에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미처 대답하지도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통화 속 상대방의 목소리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였다.

기묘한 전화 통화를 뒤로하고 회사에 도착했다.

동료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나 역시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자리에 앉았다.

그때 사무실 전체의 불이 잠시 깜빡였다.

곧이어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내 캠페인 홍보지를 받은 사람은
즉시 회사 밖으로 나오세요.

놀란 동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며 서로 물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눈치였다.

홍보지와 이상한 전화를 받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 안내 방송은 결국, 나를 향한 경고임을 분명히 알리고 있었다.

#5

‘뭔가 이상한 하루야.’

조심스럽게 아까 받은 종이를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구겨진 종이 아래 깔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뚜벅뚜벅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요동치던 가슴이 더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아래층으로 몸을 피했다.

어둡고 쾌쾌한 공기 속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치한 곳은 23층과 22층 사이.

바로 22.5층이었다.

그때였다.

그의 눈이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공기마저 얼어붙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가 왜 여기 있는지, 그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종이.

그것은 분명 내가 방금 전에 받은 그 종이와 똑같았다.

“너도 받은 거야?”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표정은 차가웠다.

마치 내가 말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다.

대신 그는 잠시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가 다 받았다는 게 문제야.”

그는 종이를 펼쳤다.

#6
– 이번 달엔 뭘 할래?

내가 받은 종이에 있던 것과 같은 붉은 글씨가 선명했다.

머릿속이 이해되지 않는 정보로 뒤죽박죽이었다.

오늘은 회사 지정 ‘마인드 리셋 데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록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 홍보지도 우리 둘에게만 온 듯했다.

또 이 남자는 누구지?

내가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었었지?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은 무슨 말일까?

머릿속을 정리하는 사이에 깊은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것은 남자였다.

“이 짓을 몇 번이나 해도 생각 많은 건 여전하네.”

“뭐라고?”

“……아냐.”

남자는 잠시 말을 삼켰다.

“일단 밖으로 나가자.”

“안내방송에서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말을 듣자 밖으로 나가면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왠지 영원히 멈춰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남자는 먼저 비상계단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 또한 홀린 듯 그의 뒤를 따랐다.

#7

비상계단을 벗어나 남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사옥 깊숙이 숨겨진 낯선 전산실이었다.

서버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 사이로 일정한 간격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낡은 컴퓨터.

그와 연결된 프린터가 쉴 새 없이 종이를 뱉어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확인한 종이 위에는 소름 끼치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 내가 비상계단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지금 이 방에 발을 들인 순간의 묘사.

모든 것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마지막 문장은 모니터 위에서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이번 달엔 뭘 할래? : 당신의 선택]

“이게 대체 다 뭐야?”

“어떻게 우리가 하는 말이 실시간으로…….”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앞서가던 남자가 멈춰 섰다.

그는 나를 돌아보았다.

“망설일 시간 없어.”

“시스템이 복구되면 이 기회도 사라질 테니까.”

그의 눈빛은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말고, 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써.”

나는 홀린 듯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자 묘한 전율이 일었다.

자판 위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던 손가락.

그 사이로 삼켜왔던 문장들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첫 자판을 내리눌렀다.

타닥.

정적을 깨는 둔탁한 타건음과 함께, 나의 비밀스러운 소망이 화면 위로 한 글자씩 새겨지기 시작했다.

#8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타닥.

화면 위에 찍힌 첫 문장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당장 퇴근한다.]

순간 프린터가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종이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남자는 곧장 종이를 집어 들고 내가 쓴 문장을 읽었다.

그리고 작게 비웃었다.

“푸핫. 겨우 그거야?”

“이 엄청난 시스템에 쓰는 바람이 고작 ‘퇴근’이라고?”

“하지만 역시, 다들 처음엔 그걸 쓰지.”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되물었다.

남자는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 더미를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방에 들어온 사람들은 전부 한 번씩 선택을 했어.”

남자가 모니터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리고 시스템은……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니터의 붉은 글씨가 바뀌었다.

[선택 확인 : 퇴근한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59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10분 안에 네가 진짜로 퇴근하지 못하면, 시스템이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 선택을 완수할 거야.”

“다른 방식……?”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뭐, 예를 들면…… 회사가 사라진다든지.”

그 순간, 건물 어딘가에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9

경보음이 사옥 전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모니터 속 숫자는 인정사정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9:41

“그냥 나가면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묻자 남자는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은 네가 쓴 문장이 아니라, 그 문장을 쓸 때의 ‘마음’을 실행해.”

그 순간 전산실 문밖에서 여러 사람의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내 팔을 붙잡고 뒷문으로 달렸다.

좁고 어두운 통로 끝에는 낡은 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퇴근 처리실]

문 옆 벽면에는 빛바랜 명단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는 내 이름이 여러 번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3월, 6월, 9월, 12월…….

그리고 이번 달.

“나…… 전에도 여기 온 적 있어?”

남자는 대답 대신 침묵을 지켰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5:12

문 안쪽에서 아침에 들었던 바로 그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늦으셨네요.”

“이번 달 담당자님.”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차가운 문고리를 잡았다.

남자가 낮게 읊조렸다.

“문을 열면, 모든 게 기억나게 될 거야.”

딸깍.

문이 열리자 수십 대의 모니터 화면 속에 일제히 내가 나타났다.

종이를 건네받는 나.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나.

위태로운 선택을 하는 나.

그리고 방 한가운데.

나와 함께 도망쳐온 남자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며 기묘하게 웃고 있었다.

#10

문이 열리자 좁은 방 안 가득 모니터 불빛이 번쩍였다.

화면마다 서로 다른 ‘나’가 있었다.

누군가는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누군가는 울고 있었다.

또 다른 나는 멍하니 키보드만 바라보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비상계단에서 만난 남자와 똑같은 얼굴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시스템은 사람들의 선택을 현실로 만드는 장치야.”

“넌 이미 여러 번 여기 왔었어.”

믿기 어려웠지만 벽에 붙은 기록 속에는 내 이름이 반복해서 적혀 있었다.

그 순간 경보음이 울렸다.

화면에는 남은 시간이 떠올랐다.

실행까지 남은 시간
00:00:30

남자는 내게 마지막 선택을 하라고 말했다.

예전의 나는 늘 “퇴근한다”라고 적었다고 했다.

나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타닥.

[반복을 끝낸다.]

문장을 입력하는 순간 전산실의 불빛이 차례로 꺼졌다.

모니터 속 수많은 ‘나’도 하나씩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출근길 지하철 안에 앉아 있었다.

손바닥에는 붉은 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내가 꿈을 꾼 걸까…….”

#11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상하리만치 선명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눈앞에 서 있었던 사람처럼.

얼굴은 이토록 또렷한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름도, 소속도, 심지어 정말 회사 사람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직원 검색창을 열어 떠오르는 단어들을 하나씩 입력해 보았다.

[전산실]
검색 결과 없음
[퇴근 처리실]
검색 결과 없음

그래.

나올 리가 없지.

팽팽하게 조여 있던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밀려왔다.

결국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한 채 퇴근 시간이 찾아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무심코 옆을 돌아보았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의 사원증으로 향했다.

이름을 읽으려던 순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비상계단에서 만났던 그 남자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남자가 그들 사이에 섞여 탔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닫혀 가는 문만 바라보았다.

문이 거의 닫히려는 순간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입모양만큼은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12

‘도’

‘망’

‘쳐’

굳어버린 머리로 각 음절을 합쳐 겨우 뜻을 이해하자 얼굴의 핏기가 가시는 것이 느껴졌다. 도망치라니, 그게 무슨 의미야? 누구로부터? 어디로? …그리고 왜?

엘리베이터 문을 다시 열기 위해 버튼을 다급하게 눌러봤지만, 간발의 차이로 놓친 승강기는 야속하게도 벌써 다른 층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어디서 내릴지 확인하기 위해 붉은 숫자를 확인하던 나는 금방 포기하고 시선을 돌렸다. 사람이 가득 찬 엘리베이터는 여러 층에서 멈춰서고 있었고, 그 많은 층을 나 혼자 뒤지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잠깐.”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던 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분명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와 복도에는 모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CCTV를 확인하면 남자의 얼굴뿐 아니라 어느 층에서 내려 어느 팀으로 갔는지, 이 수수께끼의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다. 수많은 모니터들이 설치된 보안실에 방문하려니, 얼마 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전산실에서의 상황이 오버랩되어 꺼려졌다. 게다가 남자가 만약 아군이라면 나는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 어디론가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13

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보안실로 간다면 남자의 정체를 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장면이 있었다.

수십 대의 모니터,

수없이 반복되던 ‘나’,

그리고 남자의 마지막 말.

그 기억이 사실이라면, CCTV를 확인하는 행동조차 이미 누군가가 예상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분명 구겨 넣었던 홍보지였다.

조심스레 펼쳐 보니 종이에 쓰인 글자가 바뀌어 있었다.

[아직도 남을 믿을 거야?]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기억상 주머니에 넣은 이후로 종이를 만진 적이 없는 게 분명했다.

넋이 나간 채로 글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봤으나 발신번호는 표시되지 않았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끝에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익숙한 숨소리가 들렸다.

“…보안실 가지 마.”

이번에는 비상계단의 남자가 아니었다.

※ 박스 안을 스크롤하면 전체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맴묘

“소소한 취향으로 하루를 채우는 나” 출퇴근 길에 좋아하는 책을 읽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휴식하고, 매일 밤 일기를 쓰며 하루 마무리하기. 이렇게 일상을 조금 더 즐겁게 만드는 작은 취향들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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