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유선 헤드폰의 즐거움

기자는 유선 헤드폰 덕후다. 음악을 듣는 것 자체로 즐거움을 느끼지만, 음악을 다양한 디바이스에서 듣는 것을 좋아한다. 주변 지인들은 ‘뭐 하러 그렇게 듣냐? 요새 좋은 무선 헤드폰/이어폰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하곤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기자 본인도 출퇴근 시에는 애플 에어팟 프로를 듣는다. 편하기 때문이다. 줄이 없어 거슬리지 않고, 노이즈 캔슬링도 되고 주변 소리를 허용하는 앰비언트 사운드도 지원한다. 하지만 유선 하이엔드 헤드폰/이어폰에 비하면 소리가 좋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소리에서 월등하다고 평가받는 유선 제품이 어쩌다 무선 제품에 주도권을 넘기게 되었을까?

2010년도 초반까지만 해도 대중교통에서 유선으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 당시만 해도 MP3 등 다양한 오디오 플레이어가 대중화되어있던 시절이었고, 스마트폰이 활성화되던 시절까지만 해도 헤드폰 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유선 헤드폰/이어폰을 사용했다. 그러나 2016년 아이폰 7에서 헤드폰 잭을 제거하면서 다른 기업들도 하나둘씩 헤드폰 잭을 제거했고, 무선 오디오 디바이스의 시대가 시작됐다. 비슷한 시기 블루투스 5.0이 출시되면서 무선 오디오 디바이스는 눈부신 발전을 하게 된다. 배터리 사용률도 줄어들고, 연결성도 좋아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블루투스를 통해 더욱 많은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게 되면서 음질도 대폭 향상됐다. 오디오 코덱도 SBC와 AAC 코덱뿐만 아니라 APTX 시리즈와 LDAC과 같은 좋은 코덱이 출시되면서 더 질 좋은 음질을 무선으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선 헤드폰으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당연히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최고의 음질로 즐기기 위해서도 있겠지만, 본인이 원하는 음색으로 음악을 좀 더 ‘튜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기로 비교하자면, 선생님이 ‘코끼리를 그려 보세요’라고 말했을 때 생뚱맞게 호랑이나 사자를 그려오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사람마다 코끼리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코를 강조, 다른 사람은 코끼리 상아 혹은 큰 귀를 강조해서 그린다.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다르게 그림 그리듯 이어폰/헤드폰도 같은 음악을 다르게 해석해서 우리 귀에 들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드폰을 수집한다. 다양한 헤드폰이 있지만 우선 카테고리별로 분류해 보겠다.


1. 헤드폰 외형: 오픈형 / 밀폐형

밀폐형은 시중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헤드폰이다. 밀폐형은 헤드폰을 착용 시 소리가 밖으로 새지 않는다. 외관이 뚫려있는 오픈형 헤드폰은 밀폐형 대비 스피커 소리를 듣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하지만 외관이 뚫려 있기 때문에 소리가 작은 볼륨에서도 외부로 샌다. 외부에 들려오는 소리가 들리고, 주변 사람들도 본인이 듣고있는 음악을 다 듣게 된다. 미니 스피커를 틀고 있는 효과이기 때문에 공용 공간에서 오픈형 헤드폰을 듣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2. 헤드폰 소리: 해상도

해상도는 모니터처럼 4K, SD 해상도 차이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다.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헤드폰은 4K 해상도이고, 뭉툭하게 들리면 해상력이 떨어져 SD 해상도를 보는 느낌이다. 번들 이어폰을 듣다가 고해상도 헤드폰으로 듣게 되면, 평소에 잘 안 들렸던 특정 악기가 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3. 헤드폰 소리: 저음-중음-고음 밸런스

저음-중음-고음의 모든 밸런스를 중요시하는 올라운더 헤드폰도 있지만 특정 음을 우선시하는 헤드폰도 상당히 많다. 특정 음에 따라 어울리는 장르는 다음과 같다.

  • 저음이 강조된 제품은 힙합, 락, EDM 등에 유리하다.
  • 중음이 강조된 제품은 보컬이 강조된 가요, 팝 음악 등에 유리하다.
  • 고음이 강조된 제품은 피아노, 바이올린, 여성 보컬 음악 등에 유리하다.

하지만 모든 게 위 3분류로 딱 나누어 지진 않는다. 예를 들어 락과 EDM 음악의 경우엔 저음뿐만 아니라 초고음이 강조되어야 더 좋게 들린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헤드폰 가격대가 비싸면 비싸질수록 올라운더 제품이 많이 보인다.

4. 헤드폰 소리: 공간감

소리를 3차원으로 생각해 보자. 공감표현능력은 해상도와는 다르게 공간이 좁다면 다양한 악기 소리가 뭉쳐 들린다고 생각하면 된다. 대체로 공간감은 오픈형 헤드폰이 밀폐형 헤드폰보다 넓게 표현된다.

5. 헤드폰 소리: 저함(옴/Ω)

복잡한 이론은 제쳐 두고 저항이 높은 헤드폰을 이용할수록 헤드폰 앰프가 필수적이다. 저항 32옴 되는 헤드폰은 휴대폰으로도 음악 재생이 가능하지만, 100옴 되는 헤드폰 같은 경우 휴대폰에 직접 연결할 경우 음은 들리지만, 볼륨이 많이 올라가지 않고, 음악이 힘차게 다가오지 않는다.
지인들에게 헤드폰에 관해 간략히 설명을 할 때면

“오케이, 그럼 오픈형 헤드폰에 해상도, 공간감 좋고
올라운더 헤드폰을 저항 높더라도 헤드폰 앰프 물려 사용하면 되지 않아?”

라고 대답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헤드폰 가격이 200만 원~500만 원 사이가 되고, 해당 헤드폰이 필요한 소리를 울리기 위해서는 가격이 나가는 헤드폰 DAC와 앰프가 필요하다.

위 카테고리 외에도 헤드폰 구매 시 고려해야 할 요소는 다음과 같다.

1. DAC/앰프 보유

헤드폰 구동 시 보유한 DAC/엠프에 따라 소리가 달라질 수 있다. CD 등장 이후 음원은 디지털 형태로 기록되어 왔다. 아날로그 디바이스인 헤드폰에 소리를 울리기 위해서는 디지털 음원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변환해야 한다. DAC는 말 그대로 디지털 투 아날로그 컨버터이고, 앰프는 헤드폰이 충분한 소리를 울릴 수 있도록 볼륨을 증폭해 주는 디바이스다.

  • DAC는 휴대폰, CD/MP3 플레이어, TV 등 대다수 제품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별도로 구매하는 것이 필수는 아니다. 물론 별도로 보유하면 더욱 본인 취향에 맞는 사운드를 청취할 수 있다.
  • 앰프는 볼륨만 충분히 확보된다면 필수 사항은 아니다. 그러나 앰프 역시 가지고 있다면 충분한 볼륨을 쉽게 낼 수 있어 좋다.
  • DAC와 앰프도 소리 특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어떤 헤드폰과 매칭(페어링)을 해주냐 따라서 다른 소리를 들려준다. 예를 들어 헤드폰이 저음 성향이고 앰프가 고음 성향일 경우 서로의 취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다.
  • 요새 출시되는 대다수 제품은 DAC/앰프가 한 개의 제품에 올인원 형태로 들어있다. DAC와 앰프를 각각 구분해서 조합할 경우 다른 소리를 조합해 새로운 소리를 만들 수 있지만, 반드시 별도로 구매할 필요는 없다. 본인이 원하는 소리를 들려준다고 판단되면 그게 정답이다.

2. 디자인(착용감)/무게

디자인(착용감)/무게: 헤드폰은 디자인과 무게는 다양하다. 인간의 머리/귀 모양/사이즈는 각기 다르고 개인별 착용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격대가 높은 헤드폰을 구매할 경우 반드시 착용해 보고 편한 헤드폰을 구입하는 것을 권장한다. 무거운 헤드폰은 500그램이 넘는 경우도 있기에 아무리 좋은 사운드를 내주는 헤드폰이어도 착용감이 좋지 않다면 중고장터행이 되기 십상이다.

3. 가성비

헤드폰 가격은 몇만 원에서 수천만 원의 다양한 가격대의 제품이 존재하고, 그중 가성비 헤드폰도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술과 비슷하다. 100만 원짜리 와인이 1만 원 와인보다 100배 맛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가성비 포인트가 존재하며, 어느 수준 이상을 뛰어넘으면 본인 기준 5% 더 좋은 소리를 듣기 위해서 2배 이상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본인 지갑 사정에 맞추어서 추구하는 사운드를 찾는 것을 추천한다.

4. 좋은 소리는 주관적이다

재미/즐거움 등 이상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렇듯, 좋은 소리는 추구하는 지점이 모두에게 다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의 의견만을 가지고 구매를 하는 방식은 추천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리뷰는 참고만 해야지 본인의 최종 선택 기준이 된다면 후회할 확률이 높다.

5. 음질 좋은 소스 사용

성능이 좋은 헤드폰의 사용을 결심했다면, 일반 MP3나 압축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기보다는 FLAC가 같은 무손실 파일 혹은 무손실 스트리밍 서비스 이용을 권장한다. 압축된 음원을 듣는 것은 4K 모니터로 SD 퀄리티 이미지를 보는 것과 동일하다. 헤드폰의 풀 포텐셜을 체감하기 어렵다.

기자는 플랫한 사운드를 추구하고 오픈형 헤드폰을 좋아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헤드폰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몇몇 ‘갬성’적인 헤드폰도 보유하고 있다.

1. Sennheiser HD800s

해상도와 공간감이 뛰어나 오케스트라 음악과 라이브 음반을 듣기 좋은 헤드폰.

2. Focal Clear MG

풍부한 저음과 따뜻한 소리 때문에 ROCK, EDM과 R&B가 특히 잘 어울리는 헤드폰.

3. Sennheiser x DROP HD6xx

보컬 중심인 음악을 듣기에 좋은 헤드폰. (ex. 샘 스미스, 아델 등) 젠하이저와 드롭이라는 회사에서 같이 콜라보해서 생산한 제품이다. HD650 헤드폰과 많이 유사한 소리를 들려주는 헤드폰이다. 드롭 웹사이트에서 세일하면 배송비 포함해서 200불 아래로 관세 없이 구매 가능하다. 헤드폰 세계 입문자에게 추천할 만한 가성비 킹 제품!

4. AKG x DROP 7xx

의외로 영화 볼 때 많이 사용하는 헤드폰이다. 소리가 편안하고 볼륨을 높여도 자극적이지 않아 극저음을 때리면서 들려오는 영화 OST나 빵빵 터지는 마이클 베이 액션 영화도 귀에 많은 부담을 주지 않는다.

5. Hifiman x DROP HE-5xx

평판형 헤드폰을 저렴한 가격에 이용해 보고 싶고 공간감이 넓은 헤드폰을 원한다면 추천한다.

6. GRADO SR80e

이 헤드폰은 요새 말하는 ‘갬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헤드폰이다. 플랫한 사운드와는 거리가 있다. 90년도 ~ 00년도 초반, 워크맨/디스크맨/MD시대 음악과 당시 사운드를 추구한다면 추천한다. 힘찬 사운드를 재생해 주기는 하는데 요새 기준의 ‘힘찬 느낌’하고는 다소 다르다.

7. GRADO GS1000e

GRADO SR80e와 마찬가지로 같은 맥락의 ‘갬성’적인 헤드폰이다. 보컬이 좀 더 앞으로 나와서 들리기 때문에 악기가 적고 보컬이 강조되는 어쿠스틱 음악에 적합하다. 그라도라는 브랜드가 락에 특화되었다고 하는데, 기자는 이 그라도 헤드폰으로 락을 들을 때면 뭉개진 음이 힘차게 들려서 오히려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8. T+A Solitaire P-SE

이 기사를 쓰다 보니, 새로운 헤드폰 구매에 대한 지름신이 강림하여 구매한 녀석이다. 복지포인트를 한 번에 다 탕진하고도 부족한 이 헤드폰….

소리는 기가 막힌다. 해상도가 너무 좋아서 같은 음악을 들어도, 평소에 약하게 들리던 소리도 다 들리는 헤드폰이다. 그렇다고 안 들리던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평상시에 정말 집중해서 들었어야 들리는 작은 디테일을 좀 더 쉽게 들려준다.

비유하자면, 기존 노래를 리믹스 한 것처럼 소리가 달라지지 않지만, 오래된 음반을 리마스터링한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헤드폰이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비유입니다… 실제로 옛날 음반을 리마스터링 한 수준으로 끌어올리지는 못한다.)


회사 지인들에게 Focal Clear MG와 휴대용 DAC/앰프인 iFi Diablo로 본인이 듣고 싶은 음악을 들려준 후, 피드백을 받아 보았다.

  • 참가자 A: 음악에 대한 해상도가 올라간 것은 느껴진다. 소리에 대한 울림은 느껴지지만, 공간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30만 원 헤드폰에서 들려주는 소리와 많이 차이는 느껴지지 않는다. (청취 음악: 힙합)
  • 참가자 B: 해상도가 느껴지면서 음이 더 잘 들리는 기분이다. 플라시보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이 더 잘 들리면서 노래도 청량하게 들리는 기분이다 (청취 음악: 90년대 가요)
  • 참가자 C: 소리가 청아하게 들림. 막귀라 좋다는 헤드셋이랑 차이점을 잘 못 느끼는 편인데, 에어팟이랑 비교해 보면 특히, 베이스 소리가 하나하나 살아있어서 콘서트장에서 듣는 느낌이 듦. (청취 음악: 힙합, 가요)

역시나 다를까 평가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헤드폰이 들려주는 즐거움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운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운드 시그니처는 각기 다르다. 여기에 각 개인이 좋아하는 음악의 장르, 디자인 취향/착용감을 고려하면 개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헤드폰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DAC/앰프의 맥스 매칭까지 고려하면 옵션은 무궁무진하다. 헤드폰 구매 전에는 본인이 직접 들어보고 체험해 보는 게 정말로 중요하다. 본인에게 어울리는 헤드폰을 찾고 싶다면, 어떤 헤드폰이 좋을까 검색해 보기보다는 다양한 브랜드를 취급하는 청음샵에서 체험을 통해 본인만의 시작점을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세에*자드 같은 청음샵을 가면 눈치 보지 않고 진득하게 다양한 제품을 체험할 수 있다.) 물론, 주변에 오디오 기기 애호가에게 물어보는 것도 좋다. 모두 즐거움 음감 생활하시길 기원하며 이 기사를 마친다.

정세윤 기자

헤드폰 세계에 빠진 지 15년이 넘었지만, 단 한 번도 이와 관련해서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본 적은 없는데요. 이렇게 글로 정리해 보니, 주관적인 경험과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네요. 프로로서 글 쓰시는 분들, 존경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