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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적힌 각본은 재미없다: 로그라이크 이야기 생성기, 림월드(RimWorld)

  • 플랫폼: PC(Steam)
  • 개발사: Ludeon Studios
  • 출시일: 2018년 10월 17일
  • 장르: 샌드박스형 건설 경영 시뮬레이션
  • 게임 엔진: Unity

미리 쓰인 대본 없는 세계, AI가 만드는 진짜 이야기

림월드는 플레이어에게 미리 써둔 대본을 건네지 않는다. 대신 ‘스토리텔러(Storyteller)’라 불리는 AI가 실시간으로 사건을 엮으며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 게임은 일종의 이야기 생성기이자, 동시에 잔혹한 로그라이크 생존 시뮬레이터다.

게임의 시작은 단순하다. 세 명의 낯선 생존자가 미지의 행성에 불시착한다. 이들은 대단한 영웅이 아니다. ‘방화광’ 성향의 전직 요리사, ‘비관주의자’ 늙은 과학자, 혹은 ‘게으름’ 특성을 가진 귀족 출신일 수도 있다. 이 결함투성이 인간들의 조합 자체가 이미 첫 번째 갈등의 씨앗이자 게임의 재미를 만들어내는 주역이 된다.

예측 불가능한 이야기, 스스로 써내려가는 서바이벌 로그

지붕 짓는 것을 깜빡한 사이 폭우에 식량이 썩어 굶주림이 찾아오고, 연인의 죽음을 견디지 못한 정착민이 정신 붕괴로 동료를 공격하거나 기지에 불을 지를 수도 있다. 평화롭게 농장을 확장하던 어느 날 갑작스레 메카노이드 군단이 습격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위기가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림월드의 진짜 매력은 단순한 ‘위기’가 아니라 ‘딜레마’에 있다.

자원이 고갈된 절망적인 순간, 하늘에서 추락한 수송 포드 속엔 정착민의 실종된 형제가 있다. 그는 심각한 부상과 전염병에 시달린다. 그를 살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약을 써야 할까? 하지만 그 약을 쓰면 다음 질병이 닥쳤을 때 모두가 무방비가 된다. 그렇다고 형제를 구하지 않으면 정착민의 정신이 붕괴되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림월드가 진정한 걸작인 이유는 이처럼 사건이 아니라 맥락 때문이다. 정착민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그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다. 탐욕 때문에 식량을 훔치다 감옥에 갇혀 굶은 것인가? 아니면 의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몫을 내어주고 쓰러진 것인가? 심장을 잃은 생존자가 전투 중 죽은 연인의 심장을 이식받아 살아났다면 그 생존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이처럼 플레이어의 윤리적 선택과 세계의 무작위 사건이 얽히며 의도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인간적인 서사가 탄생한다.

냉혹한 전투, 실시간 전술의 깊이

림월드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생존 자체가 전투다.

야만적인 해적, 식인 부족, 그리고 고대의 기계 병기들이 정착지를 끊임없이 위협한다. 플레이어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냉철한 지휘관이 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는 디펜스 게임처럼 정착민의 무장을 고려해 배치하고, 바위나 벽 같은 엄폐물을 활용하며, 적의 진입 동선을 계산해 킬존(Kill Zone)을 설계한다. 하지만 이 싸움은 단순히 총과 포탑만의 문제가 아니다.

플레이어는 기지의 모든 시스템을 무기로 활용한다. 적을 좁은 복도로 유인해 난방기로 온도를 수백 도까지 올려 태우거나, 일부러 야생동물들을 광란하게 만들어 적들을 처리할 수도 있다. 에너지와 설비, 자연 환경까지 모두 전술이 된다.

끝없는 리플레이성, 진짜 로그라이크의 매력

림월드는 ‘엔딩’을 향해 달리는 게임이 아니다. 원한다면 탈출 대신 행성을 정복해버릴 수도 있고, 매 플레이마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래서 유저들의 플레이 타임은 농담이 아니라 수백, 수천 시간을 넘어선다. 몇백 시간 플레이한 유저는 그저 초심자에 불과하다.

림월드는 단순히 스토리가 좋은 게임도, 전투가 뛰어난 게임도 아니다. 이야기와 시스템, 전투와 선택이 서로 맞물려 “한 사람의 사소한 결정이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를 체험하게 만든다.

매번 플레이할 때마다 달라지는 예측 불가능한 스토리, 실패조차 다음 이야기의 장엄한 일부가 되는 무자비한 로그라이크 구조, 그리고 뇌를 자극하는 냉혹한 실시간 전술 전투. 이 세 가지 거대한 기둥이 만나 림월드를 대체 불가능한 ‘시간 도둑’이자 ‘경험 제조기’로 만든다.

한 번 이 행성에 발을 들이면, 당신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곳에서 또 다른 삶을 경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여진 기자

림월드 플레이타임 300시간 뉴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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